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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발레: 즉흥, 구겨진 아티튜드 

<메타발레: 즉흥, 구겨진 아티튜드>는 발레리나가 주체가 되는 움직임 충동을 실험한다. 발레를 체화한 몸에서 나오는 춤은 과연 발레의 경계 안과 밖 그 어디쯤을 배회하게 될까. 발레와 즉흥, 규율과 충동 사이에서 지금의 발레를 묻는다.

 

일시: 2025년 12월 20일(토)~21일(일)

토요일 오후 4시/7시 30분, 일요일 오후 4시

장소: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안무•컨셉 | 윤상은

리서치•퍼포먼스 | 고혜주 김민수 김소혜 임언주

음악 | 한정원 

드라마트루기 | 이민진

무대디자인 | 조경재

조명디자인 | 서가영

그래픽디자인 | 붉은사슴

무대감독 | 서현진 이율

사진/영상기록 | 오프레임

행정 | 이보휘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주최 주관 | 윤상은 

2025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 선정 프로젝트

서울문화재단 SPAC 홍보 페이지

공연 하이라이트

 안무 노트 

 

‘발레로 즉흥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작업을 했다. 기존에 비전공자들과 했던 작업의 질문에 이어 이번에는 발레 전공자들의 몸에서도 그러한 즉흥이 가능한가 실험하였다. 전공자들은 발레가 이미 체화된 내부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면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발레 즉흥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이미 습관화된 발레 테크닉에 갇혀 모던 발레 그 이상의 형태로 더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번 작업은 발레 전공자 스스로 쌓아온 발레의 역사를 하나 하나 해부하면서 동시에 한 걸음 나와서 보고(메타 인지) 그것을 스스로가 ‘구기는’ 것이 중요한 미션이 된다. 

 작업을 하는 과정은 즐거웠다. 여러 우려와는 다르게 오디션을 통해 뽑은 발레 전공자들은 즉흥을 하는 과정을 즐겼다. 그런데 내가 제시하는 즉흥은 막연하게 자유로운 춤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발레’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즉흥이 가능해야 했다. 그렇다면 결국 질문은 또다시 ‘발레가 무엇인가’였다. 우리는 ‘발레를 발레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발레의 전통적 메소드부터 테크닉, 발레가 가진 귀족적인 태도 등 우리는 발레라고 불리는 부분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발레 동작 중간에 일상적인 것을 튀어 나오도록 하기, 글쓰기 자유연상처럼 발레 동작 자유연상하기, 너무 많이 연습해서 자다가도 일어나서 할 수 있을 정도인 10대 시절 발레 콩쿨 작품에서 포즈 동작만 추출하기(포즈만으로도 발레의 정의가 충족된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다양한 방법론들은 토론에서 출발했다. 돌이켜보면 결국 ‘발레와 발레 아닌 것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를 한 것 같다. (어떤 관객은 ‘발레와 발레가 아닌 것이 혼재된 거대한 발레를 본 기분’이라고 했다.) 

 여기서 발레가 원하는 대로 구겨졌는가 질문한다면, 아직은 잘 모르겠다. 공연 2달여 전 진행된 내부 쇼케이스에서 관계자들은 ‘발레를 더 구겨주세요’라는 요청이 많았다. 동시대 발레를 고민하는 자들에게는 아직 모자란 것이다. 이것은 내가 발레를 비트는 작업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매번 들어온 얘기다. 더 과감하게, 더 파격적으로. 

  더 과감하고 파격적이라는 건 뭘까. 어떤 금기를 깨는 것, 윤리의 경계에 있는 것 등이 떠오른다. 내가 아직 그곳으로 가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한 가지는 이 작업이 나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무용수라는 거울을 반영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는 무용수들은 (작품의 특성 상) 이제 막 새로운 시도를 하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런 무용수들과 작업을 할 때 나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강요하기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쪽을 택한다. 또한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기에 지극히 상식적이며 공평하게 모두를 대한다. 나는 이런 관계 지향적인 작업이 우선이기에 이단아 같은 모습을 기대한 누군가에게는 아쉽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공연은 애초에 ‘금기를 깨는 것’에 방점이 있기 보다는 ‘경계를 건드리는 것’이 더 중요한 작업이다. 발레와 발레 아닌 것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관객들의 머릿속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구성된 발레의 진한 테두리를 애써 밀어내는 싸움과 흐려진 테두리를 애써 부여잡는 싸움이 동시에 일어난다. 나는 그 작용을 일으키는 다양한 메소드를 실험한 것이다. 동작의 연결을 해체하여 따로 따로 나열하고, 맥락 없이 무용수의 감정(애절함)을 끌어내고, 입을 열지 않는 발레리나들을 말하게 하는 것. 이번에 나에게 주어진 자원 안에서 많은 실험을 했다. 그리고 공연이라는 매무새를 갖추어 선보였다.

2026. 1 

드라마터그의 글

발레를 볼 때 우리는 다른 무용 장르보다 훨씬 강한 경계와 고정관념을 마주한다. 왜 발레만 이렇게 단단한 틀과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일까. 그것은 타협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다듬어온 클래식 이기 때문일까. 혹은 어디론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상승해야만 현실이 환상으로 성립되는 특유의 유포리아 때문일까.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받으면서도,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무대를 보며 아름답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 관객이 얼마나 있을까. 발레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아니, 부정할 필요가 있는가조차 되묻게 되는, 견고하고 지속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렇기에 발레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를 묻는 질문은 애초에 무의미하다. 이미 너무나 유효하기 때문에 지금도 질문되고, 지금도 사랑받는다.

한 번도 발레 레퍼토리를 본 적도 없고, 토슈즈를 신어본 적도 없는 나는 철저히 ‘발레 외부자’의 시선으로 이 작업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이것이 발레인가 아닌가를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발레가 발레일 수 있도록, 그저 발레의 시간과 발레의 몸이 만들어내는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감상할 뿐이다. 이것이 발레라면 어떻고, 발레가 아니라면 또 어떠한가. 발레가 꼭 고난 끝에 획득해야 하는 기술이나 태도가 아니라, 열렬히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는 없을까?

<메타발레: 즉흥, 구겨진 아티튜드>는 아마도 그 경계 위에서, 발레라는 몸의 역사를 찢고, 구기고, 다시 펴보는 시도일 것이다. 발레가 스스로를 갱신하는 방식은 어쩌면 이렇게, 사랑하는 자들의 몸을 통해 비로소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발레라는 언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무용수들의 찰나의 선택들, 그리고 무의식적 욕망이 즉흥의 형태로 수면위로 떠오르는 몸짓들. 이 모든 것이 극장이라는 공간을 넘어, 그들의 일상과 삶, 그리고 관객의 감각 속으로 번져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오래 좋아하다 보면, 이유 없이 빠져들기도 하고, 때로는 그 마음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윤상은 안무가에게 발레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 삶 속에서 계속 숨 쉬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더 가까워지기 위해 잠시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와 마주하게 되는 선택. 이 작업은 그 재회의 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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